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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CT 시장, 갈라파고스의 저주를 풀어라

2010년 아이폰 쇼크 이후 국내에서 유행한 주장 중 하나는 이제 한국 기업이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초기 진입자'(first mover)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온 배경은 간단하다. 한국의 대표적 ICT 기업과 미국의 대표적 ICT 기업의 비교이다. 일례로 삼성은 빠른 추격자고, 애플과 구글은 시장 개척자다. 애플은 스마트폰을 대중화시켰고, 구글은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러한 플랫폼 기업이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된 현재 ICT 시장에서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얻어간다. 그런 시장 구조 하에서 삼성과 같은 단말기 제조사는 슈퍼을이긴 하지만 플랫폼 기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애플, 구글이 삼성보다 앞서 있으니까 삼성 역시 애플, 구글처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초기 진입자론의 역설은 이제 그만 베끼자는 주장이 순수 논리상으로는 ‘국내의 대표적 ICT 기업’이 이제 ‘미국의 대표적 ICT 기업’을 따라가야 한다는 또다른 베끼기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초기 진입자’로 보고 우러러보는 이들 기업들이 반드시 시장에서 최초여서 성공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잡스가 최초로 스마트폰을 만든 것은 아니다. 애플의 아이폰보다 노키아의 심비안이 스마트폰 시장을 먼저 열었다. 단지, 스마트폰을 대중화시킨 것이 잡스다.

이건 경영사에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왕이라 기록된 헨리 포드도 자동차를 처음 만들지 않았다. 자동차를 미국 소비사회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만든 것이 헨리 포드였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중요한 건 남보다 ‘가장 먼저’ 점을 찍는 것이 아니다. 남이 보지 못한, 그러나 모두가 보고 싶어했던 ‘점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긋는 것(connecting the dots)이다. 시장의 선도 기업은 무모한 도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능한 것들을 재조합하는 예술을 알고 있다. 발명은 최초인 것이 가치가 있지만, 혁신은 대중화에 의미가 있다.

한국 ICT 시장의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충실한 모방가여서가 아니다. 우리가 충실한 모방가란 얘기는 글로벌 시장의 움직임을 최초로 이끌지는 않지만 빠르게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익히 알듯이 아이폰 쇼크 이전의 한국 단말기 제조사와 통신사는 애플과 구글이 재편하고 있던 글로벌 ICT 시장의 흐름을 과감하게 무시했다. 형식적으로는 국내 모바일 표준 플랫폼인 위피(WIPI)가 아이폰이 국내에 85번째로 들어온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통신사와 제조사간의 암묵적인 담합이 원인이었다. 갈라포고스의 정의는 단순한 고립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 원인으로 인해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무관한 시장 진화가 이뤄지는 현상이다. 따라오는 기업들, 국가들 없이 혼자만 가는 시장의 발전한 결과다. 이건 오히려 글로벌 시장의 흐름에 충실했다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초기 진입자론이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맹점이 있다. 시장이 갈라파고스인 상황하에서는 한국 시장에서 최고가 되면, 한국 시장에서 적응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세계 시장에서는 겉돌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스탠포드의 쇼렌스타인 아태평양 연구소 연구원인 켄지 큐시다는 2011년에 발표한 일본 ICT 시장 관련 논문에서 일본 ICT 시장을 갈라파고스라 지적하며 이런 시장에서는 오히려 기업이 잘 하면 잘 할 수록 고립된다고 했는데, 같은 갈라파고스인 한국도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공인인증서 문제를 비롯한 각종 ‘국내 최초, 세계 유일 규제’들을 먼저 철회하고 폐기하지 않는 한, 그래서 한국 시장과 세계 시장간의 싱크로율을 높이지 않는 이상, 초기 진입자론과 같은 기업 수준의 대안은 소용이 없다.

금속활자는 한국이 먼저 발명했지만 세상을 바꾼 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고, 정허의 함대가 앞서 대양을 건넜지만 대륙간 무역을 이끈 건 대항해시대다. 이건 개인의 차이가 아니다. 뛰어난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은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은 좀 더 자유로운 경제 제도, 정치 제도하에서 자신의 재능을 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고 그 다양성을 통해서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 ICT 시장은 기록적인 ICT 인프라 구축을 통해서 빠르게 성장했다. 인터넷 속도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 성장을 담보하진 않는다. 오히려 아이폰 쇼크 이후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 성장의 한계를 경험했다. 앞서 분석했듯 그 벽을 넘는 건 기업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장에선 기업이 잘 하면 잘 할수록 글로벌에서는 더 고립되기 때문이다. 철저히 한국 시장에 맞춰 진화한 네이버가 글로벌 시장과 따로 노는 것도, 그리고 NHN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것이 일본을 교두보로 라인을 통해 성공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시장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장의 룰을 정하는 것, 자유로운 경쟁 질서와 이용자 권리 보장을 정하는 것이 진정한 정부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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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pagos

(사진 : http://www.flickr.com/photos/12615511@N08/4418218916.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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